경주시에 있는 옥산서원, 독락당, 장상서원을 탐방했습니다. 1, 2, 3, 4, 5편에서는 옥산서원 마을 입구부터 탐방을 시작하여 옥산서원, 세심대, 경주독락당을 거쳐 귀후재까지 갔던 과정을 따라갔습니다. 옥산서원은 유생을 가르치는 지방의 교육기관입니다. 그리고 회재 이언적의 위패를 모시고 있습니다. 독락당은 회재가 낙향하여 살던 곳입니다. 자연경관과 잘 어울리는 건물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귀후재에서 정혜사지 십삼층석탑까지의 과정을 소개하겠습니다. 경주시에 있는 옥산서원, 독락당, 장상서원을 탐방했습니다. 1, 2, 3, 4, 5편에서는 옥산서원 마을 입구부터 탐방을 시작하여 옥산서원, 세심대, 경주독락당을 거쳐 귀후재까지 갔던 과정을 따라갔습니다. 옥산서원은 유생을 가르치는 지방의 교육기관입니다. 그리고 회재 이언적의 위패를 모시고 있습니다. 독락당은 회재가 낙향하여 살던 곳입니다. 자연경관과 잘 어울리는 건물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귀후재에서 정혜사지 십삼층석탑까지의 과정을 소개하겠습니다.
문화재자료제618호경주귀후재표지석문화재자료제618호경주귀후재표지석
여강이씨강학당, 지금은 전통예절교육관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여강이씨강학당, 지금은 전통예절교육관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주막채 주막채
주막동 정문 주막동 정문
여강이씨의 강학당은 지금은 농어촌 인성학교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강이씨의 강학당은 지금은 농어촌 인성학교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A동 농어촌인성학교입니다. A동 농어촌인성학교입니다.
농어촌 인성학교 교표 농어촌 인성학교 교표
귀후재 정문 귀후재 정문
키프제 마루 키프제 마루
귀후재 현판인 귀후재는 이상규(1624~1696))의 호입니다. 귀후재는 조선 현종 3년(1662)에 이상규가 여강이씨의 자제를 교육하기 위해 설립하였습니다. 이곳 옥산마을은 약 500년 동안 여강 이씨가 살고 있는 곳이며, 귀후재는 여강 이씨 자제교육의 대표적인 교육기관입니다. 귀후재의 귀후는 덕을 베풀면 무심하고 덕이 있는 곳으로 돌아온다는 뜻입니다. 이말은논어학리편9장에서증자가한말입니다. 마침(초상)을신중히하고(조상을)멀리추모하면백성의덕이풍요로운곳으로돌아오니증자일신종추원민덕귀후의 귀후재 현판인 귀후재는 이상규(1624~1696))의 호입니다. 귀후재는 조선 현종 3년(1662)에 이상규가 여강이씨의 자제를 교육하기 위해 설립하였습니다. 이곳 옥산마을은 약 500년 동안 여강 이씨가 살고 있는 곳이며, 귀후재는 여강 이씨 자제교육의 대표적인 교육기관입니다. 귀후재의 귀후는 덕을 베풀면 무심하고 덕이 있는 곳으로 돌아온다는 뜻입니다. 이말은논어학리편9장에서증자가한말입니다. 마침(초상)을신중히하고(조상을)멀리추모하면백성의덕이풍요로운곳으로돌아오니증자일신종추원민덕귀후의
증자는 군자에게 들으라고 한 말입니다. 살아있을 때 잘했으면 좋았을 텐데, 이제 돌아가셨으니까 상사를 적당히 해도 되겠지라고 생각하거나 제사도 비경제적이니까 지내지 말라거나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다 보고 배우니 초상도 예를 갖춰 봉납하고 제사도 오랫동안 정성껏 모신다면 백성들의 덕은 반드시 두터운 곳으로 간다고 했습니다. 이 말이 귀후입니다. 증자는 군자에게 들으라고 한 말입니다. 살아있을 때 잘했으면 좋았을 텐데, 이제 돌아가셨으니까 상사를 적당히 해도 되겠지라고 생각하거나 제사도 비경제적이니까 지내지 말라거나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다 보고 배우니 초상도 예를 갖춰 봉납하고 제사도 오랫동안 정성껏 모신다면 백성들의 덕은 반드시 두터운 곳으로 간다고 했습니다. 이 말이 귀후입니다.
귀후재 안채, 귀후재 안채
귀후재 대청마루 귀후재 대청마루
경주 독락당 귀후재 탐방을 마치고 큰길로 나와 장산서원으로 갑니다. 경주 독락당 귀후재 탐방을 마치고 큰길로 나와 장산서원으로 갑니다.
장산서원 길잡이 여기서 북쪽으로 800m 위로 가면 있어요. 장산서원 길잡이 여기서 북쪽으로 800m 위로 가면 있어요.
남천.
담 너머로 본 독락당 관리인들이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담 너머로 본 독락당 관리인들이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독락당 사랑채 오른쪽에 솟을대문이 있습니다. 문을 통과하면 ‘이쪽으로 오면 사가니까 출입하지 마세요’라는 표지판이 있는 곳입니다. 여기서 보시면 다 보여요. 독락당 사랑채 오른쪽에 솟을대문이 있습니다. 문을 통과하면 ‘이쪽으로 오면 사가니까 출입하지 마세요’라는 표지판이 있는 곳입니다. 여기서 보시면 다 보여요.
담 너머로 보이는 독락당 담 너머로 보이는 독락당
담 너머로 본 회재유물관 담 너머로 본 회재유물관
재의유물관협문재의유물관협문
회재유물관 담장 너머에서 본 것입니다. 회재유물관 담장 너머에서 본 것입니다.
끌어본 회재유물관 현판 끌어본 회재유물관 현판
옆에서 본 유물관, 독락당, 사랑채를 통해서 유물관을 보려고 했는데 출입을 금지해서 볼 수는 없었지만 오히려 밖에 나가서 이렇게 담 너머로 볼 수도 있습니다. 옆에서 본 유물관, 독락당, 사랑채를 통해서 유물관을 보려고 했는데 출입을 금지해서 볼 수는 없었지만 오히려 밖에 나가서 이렇게 담 너머로 볼 수도 있습니다.
아, 도덕산 아, 도덕산
정혜사지13층석탑길잡이 정혜사지13층석탑길잡이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도덕암에 갑니다. 13층 석탑을 보고 도덕암에 가려고 합니다.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도덕암에 갑니다. 13층 석탑을 보고 도덕암에 가려고 합니다.
경주 정혜사지 십삼층석탑 안내판 정혜사는 당나라 사람인 백우경이 귀순하여 살던 집을 나중에 절로 고친 것이라고 합니다. 경주 정혜사지 십삼층석탑 안내판 정혜사는 당나라 사람인 백우경이 귀순하여 살던 집을 나중에 절로 고친 것이라고 합니다.
경주 정혜사지 십삼층석탑 13층석탑은 1층만 매우 높고 나머지 층은 작게 만들어진 것이 특징입니다. 경주 정혜사지 십삼층석탑 13층석탑은 1층만 매우 높고 나머지 층은 작게 만들어진 것이 특징입니다.
경주 정혜사지 십삼층석탑 1층에는 4개의 기둥을 세워 형태를 만들고 있습니다. 경주 정혜사지 십삼층석탑 1층에는 4개의 기둥을 세워 형태를 만들고 있습니다.
경주 정혜사지 십삼층석탑 정상에는 머리장식돌인 노반이 남아있습니다. 지붕돌과 돌을 일체형으로 제작하여 쌓았습니다. 경주 정혜사지 십삼층석탑 정상에는 머리장식돌인 노반이 남아있습니다. 지붕돌과 돌을 일체형으로 제작하여 쌓았습니다.
국보 제40호인 정혜사지 십삼층석탑의 표지석 옥산서원 7/7편에 이어집니다. 국보 제40호인 정혜사지 십삼층석탑의 표지석 옥산서원 7/7편에 이어집니다.